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가디슈 전투 (문단 편집) === [[시아드 바레]]의 22년 독재 ===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751d489889c2d20a640588c348d49477.jpg|width=100%]] || || 시아드 바레 육군 소장([[1919년]]~[[1995년]])|| [[1969년]] [[시아드 바레]](Siad Barre) 장군이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 대통령에 취임하여 소말리아 민주공화국을 세우고 친소련, 공산주의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1977년 영토분쟁을 이유로 역시 친소노선을 걷고 있던 이웃국가 [[오가덴 전쟁|에티오피아를 침공]]하면서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소련]]과 [[쿠바]]의 에티오피아 지원 때문에 오가덴 전쟁에서 패전하자 소련과의 우호협력조약을 폐기하고 아예 [[단교|국교를 단절]]해 버렸다. [[오가덴 전쟁]] 이후 반소련으로 돌아선 시아드 바레는 1980년대 들어서 '''[[미국]]'''과 '''[[중국]]'''에 접근하였다. 1970년대 당시 에티오피아와 앙골라, 모잠비크, 콩고공화국 등을 비롯해 아프리카 곳곳에 친소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며 아프리카가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서려던 걸 우려하던 서방권은 집권 초반기에 친소 사회주의 군부 정권이었던 소말리아의 시아드 바레 정부가 친미 노선으로 갈아타자 "아프리카에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린다면 교과서로 삼아야 할 민주주의 정부"라고 추켜세워 주면서 지지하였다. 이 시기에 미국은 소말리아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시아드 바레가 그다지 긍정적인 인물이 못 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친미 노선을 견지하던 시절이 바로 시아드 바레의 막장짓이 제대로 빛을 발하던 시기였다. 아이디드를 까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물러날 때까지 친미지도자를 자처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서방권에선 시아드 바레의 문제점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적은 경향이 있는데, 이 시기의 시아드 바레도 여느 아프리카의 군벌 지도자들처럼 악랄한 군부 독재자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